Geek In The Pink
2021. 2. 16. 17:392월의 밖은 아직 추웠다. 코트 괜히 입었나. 성화는 보기와 달리 딱히 따뜻하지는 않은 코트 깃을 다시 여몄다. 한번 신경 쓰는 김에 목이며 팔목에서 나는 향까지 도로 체크했다. 된 거 같다. 성화의 양손에 들린 종이봉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핑크색을 띠고 있었지만 성화는 나름 이 핑크색도 마음에 들었다. 귀엽잖아. 홍중은 질색하겠지만, 성화는 그 찌푸려지는 미간과 결국은 우스꽝스러운 핑크색 봉투를 버리지 못할 홍중이 좋았다.
성화가 서있는 곳 옆에는 아주 커다란 시계탑이 있었다. 그 시계는 홍중과 자신이 학식을 먹을 때부터 둘의 약속 장소였다. 대충 2분이 빠르지만 왠지 믿음직스럽게 커다란 시계. 약속시간은 7시였으나 홍중은 아직이었고 지금은 벌써 시계가 7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화는 평소 잘 늦지 않는 홍중이 아무 연락 없이 늦는 것이 의아했다. 그래도 20분까지는 연락하지 말고 기다리자. 괜히 폰 보다 길 미끄러운데 넘어질라. 그래도 슬슬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주인의 마음을 아는 듯 얼마 안 가 성화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미ㅣ아ㅓㄴ해'
'좀ㅁ만더기다려줄수잇어.?'
기다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답지 않은 오타는 못내 신경이 쓰였다. 성화는 살짝 언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기다리는 건 괜찮은데 지금 어디쯤 왔어?' 홍중은 1이 없어진 이후로도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짜 납치당한 거 아니야?
'..집'
성화는 하,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집이라고? 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긴 하는 거지? 평소에는 그렇게 느긋하던 손가락이 투다닥 화면을 눌렀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성화는 당장 제일 가까운 지하철 입구로 들어섰다. 개찰구에 찍히는 카드 소리가 경쾌했다.
홍중은 다른 의미로 죽을 맛이었다. 분명 계획은 완벽했는데!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3시부터 시작했던 그놈의 초콜릿 만들기가 도통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탕.. 중탕? 설탕을 한 꼬집 넣어? 한 꼬집이 뭔데, 설탕도 꼬집어지는 거야? 홍중은 가까스로 5시에 완성품을 만들어냈지만 시험 삼아 하나 입으로 넣어보고는 계획을 바꿨다. 사람이 먹을 게 아니구나, 이거. 그래도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놓고 산 초콜릿을 가져갈 순 없었다. 오늘은 무조건 자신이 만든 엄청난 초콜렛을 박성화한테 먹이고, 뜨겁고 엄청난 2월 14일을 보낼 계획이었으니까. 박성화가 초콜렛을 받고 방방 뛰는 걸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만든 초콜릿은 정말 간절하게 필요했다. 절대 포기 안 해. 각오는 좋았으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홍중은 정신없이 성화에게 카톡을 보내고 대충 집을 치우면서 초콜릿이 굳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택시 타면, 택시 타면 20분 안에 갈 수 있어.
물론,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 망했지만.
성화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코가 마비될 정도로 단 냄새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김홍중!!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계획도 같이 하얗게 날아갔다. 식탁 위의 갈색 하얀색 정체 모를 덩어리들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몰아넣고 있는 하얗게 질린 홍중과 눈을 마주친 이후로는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게.. 뭐야? 홍중은 3초쯤 굳었다가 말했다.
"어.. 보시다시피.. 초콜릿..?"
"초콜릿?"
식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망설임 없이 갈색 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어 입으로 집어넣는 박성화를 어떻게 말려. 홍중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성화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맛.. 있냐?"
"아니."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래? 음미해봐."
"다 녹았는데 이미."
성화가 제 입을 벌려 홍중 앞에 들이밀었다. 봐, 다 녹고 없지. 홍중은 살짝 갈색으로 변한 성화의 혓바닥을 멍하게 바라봤다.
"초콜릿은 내가 사 왔어. 이거 먹지 말고 내가 사 온 거 먹어."
홍중이 고개를 돌려 세상에서 제일 핑크색인 종이봉투와 마주하자 홍중의 볼이 벌게졌다.
"넌 어디서 저런 걸 사온 건데?"
"왜? 그냥 초콜릿인데."
"핑크색이잖아."
"귀엽잖아."
하, 홍중의 입새로 바람이 새나왔다. 그래. 저거라도 없었으면 오늘 로맨틱은 글렀겠다. 홍중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성화의 복실하게 세팅된 머리 위로 올라가 거침없이 쓰다듬었다. 야 이거 내가 얼마나 열심히 만든 머린데-
"눈 온다."
"눈?"
"창밖에 봐봐."
홍중과 성화가 나란히 창 밖을 본다. 작년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커녕 진눈깨비 한 번 안 내렸는데 올해는 유별나게 눈이 펑펑 많이도 왔다. 성화는 식탁 위로 걸터앉아 초콜릿 하나를 입에 물었다. 반짝이는 홍중의 눈 속에, 2월의 폭신한 눈송이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성화가 홍중의 양 볼을 가볍게 쥐고 제게로 돌려 입을 맞췄다. 눈송이가 가득 담겨있던 눈에 검은 머리 자신이 갇혔다. 홍중에게는 비밀이지만 초콜릿이 딱 기분 좋을 만큼 달았다.
'S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니 한 개 (0) | 2020.11.13 |
---|---|
세계는 사랑에 빠져있어 (1) | 2020.08.04 |
신 (0) | 2020.07.31 |
星 (0) | 2020.06.03 |
Off-line lover (0) | 2020.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