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
2020. 6. 3. 18:57나 눈으로 안녕을 말하게 해줘
입으로는 차마 할 수 없으니
나는 단단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토록 견디기 어려운지
이른 삼월에 당신이 고른 제비꽃이
우릴 웃게 했지만
난 이제 꽃을 꺾지 않고
더 이상 꽃을, 당신을 위한 장미도 없어
보석 같은 은하수 달에 살아도 사랑 없인 지옥이란다
星
사당패가 앞으로 훠이 한 바퀴 제비를 넘을 동안, 홍중은 뒤로 화롯불을 넘는다. 치마가 넘실대는 뱀의 아가리 마냥 몸을 빌빌 꼬며 남자의 머리통을 제 안으로 삼킨다.
아하- 통재라 폭군 치세 부족한 곳간에 허리가 곱아든다!
에헤이, 거 참 매정도 하셔라. 쇤네는 우리 서방님 덕에 허리가 휘는걸요!
탈을 쓴 여인네의 걸음이 사뿐사뿐, 몽글한 원을 그리며 하염없이 뱅글뱅글.
언제까지 애타게 할텐가. 자네 춘향이!
서방님도 참, 여기 춘향이 자 얼굴 들었습니다. 어서 고운 구경 하시어요-
모여 앉은 돗자리 옆 사람들이 와 하고 소리를 치며 손뼉을 맞부딪힌다. 춘향은 일주일을 꼬박 새워 놀이판 앞에 앉아 있게 만들 만큼 남정네들의 가슴에 화톳불을 붙일 줄 알았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 한번 얼굴이나 보여줄까, 하던 것이 결국 마지막 날에는 인사를 하겠거니 하는 기대감을 불러오는 탓에 오늘 놀이판은 그 어느 때보다 문전성시였다.
훠이 탈 뒤의 면사포를 휙 제치고 조금은 방정맞은 태도로 탈을 뒤이어 제친 후 흘러나오는 새까맣고 기다란 머릿결에 사람들의 입이 주먹 두 개는 들어가고 남을 만큼 널널히 비었다. 통재라. 하얗고 번들한 낯짝이 어찌 보면 남정네요, 또 어찌 보면 고운 여인네라. 그런 자태로 하늘 너머 제비를 두 바퀴 도는 것에는 견뎌낼 도리가 없었다. 참하기도 하지, 맹랑하기도 하지. 그렇다면 사내놈 치마에 사내가 들어갔던 게야?
그럴 수 있지. 저놈 얼굴을 보소. 어디 웬만큼 생겼는가, 저 치 정도면 이 동리 최고 경국지색일세!
예끼, 경국지색이 뭐야. 양귀비도 하겠구먼.
그게 그거 아니요!
시끌시끌한 사람들을 보며 치맛자락을 살랑, 하고 나부낀 춘향이는 휙 하고 까칠 맞게 뒤의 천막 문을 손으로 밀치고 지나갔다.
"요새 상놈들은 미인을 몰라봐, 나 정도면 양귀비보다 낫지. 걔는 살이 포동포동했다잖아."
안 그래 성화야?
연지 바른 예쁜 입꼬리가 가득 휘어 넘어가는 것에는 도저히 배길 재간이 없다- 하고 성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구 말 좀 해봐. 네가 봐도 난 예쁘잖아. 하긴, 줄이나 넘나들며 부채나 부치는 재미없는 네 인생에 미인이 있었겠니. 입두 꿀 먹은 벙어리겠다.
에구 우리 성화. 평생 나만 보고 살아야겠네.
앞에 앉은 덩치만 좋지 낮에는 숙맥이 따로 없는 사내의 귀가 벌개지는 것을 알면서도 홍중은 짓궂게 입을 놀렸다. 그뿐인가. 엉덩이도 가볍게 걸쳤지. 제 풀어헤친 머리를 다시 곱게 묶어 달라며 앞의 흙바닥에 앉으면 될 것을 굳이 무릎에 앉아 히히덕거리는 이에게 성화는 좋다 싫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날고 기던 춘향이도 성화 앞에서는 그냥 김홍중이었다. 선이 곱긴 했지만 어딜 봐도 남정네의 것인 얼굴이 성화의 눈앞으로 하얀 앞니를 보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희한하게 그런 치가 객들 앞에만 서면 천상천하 패왕색의 얼굴이 되니 눈길을 사로잡지 않을 수가 있나. 긴 머리를 곱게 뒤로 빗겨 하나로 묶어주던 성화는 홍중의 목덜미에다 제 코를 박고 천천히 부볐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들이 성화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던 목덜미가 석류같이 붉게 달아올라 세상 능글맞게 굴어놓고서 부끄러웠다고 고백이라도 하듯 작게 숙여졌다. 성화는 망설임 없이 그를 베어 물었다.
성화가 배곯지 않게 해준다는 말만 믿고 놀이패를 따라 전국을 떠돈 지 벌써 십 년이었다. 열두 살부터 코 질질 흘리며 비쩍 마른 몸에 거적을 걸치고 길 가던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야 했던 성화는 놀이패에 처음 왔던 때에 길고 긴 고뿔을 앓았다. 대장은 성화의 젖은 머리칼을 두어번 쓸어 넘겨주곤 성화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것으로 주어진 이부자리를 펴주었다.
부모 없던 천애 고아가 이제 제 위에 지붕이 생겼음을 알았으니 마음 놓고 아픈 게다, 하고 다들 가벼이 말했지만 제 인생살이 견뎌내기 바빠 바쁘게 뛰어다니는 어른들 틈에서 성화를 챙겨줄 만한 시간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다가도 낮이면 발이 닳게 뛰어다니고 연습하다 밤에는 취해 곯아떨어지는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꼬박꼬박 밥이며 따순 물이며 챙겨 먹이는 홍중은 정이 많아 넘치는 사람이었다. 옛날 나랏님 바뀌었을 때 화를 입은 집구석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전직 양반가 아들내미는 다른 어른들과 다르게 제 이름 석 자도 척척 써내고, 숫자로 셈도 잘하는 데다 멋드러지게 일필휘지 붓을 휘두르며 긴 천에다 뭐라고 꼬부랑 한자도 길게 써낼 수 있는 놀이패의 믿음직한 막내였다.
"야, 꼬맹이. 이름은 있어?"
"아니요. 다들 개똥이라고 부르기는 했는데."
"개똥이가 이름이냐? 촌스럽기는. 어디 보자, 오늘 별이 예쁘잖아. 소원 빌자, 너 별에 소원 빌어본 적 있어?"
"별이요? 아니요, 별‥. 잘 쳐다볼 일도 없고. 빌 소원도 딱히 없어요."
"어린 게 소원도 없어? 별에다가 소원 빈 적 없는 열두 살은 또 생전 처음 본다."
"형님도 열네 살이잖아요!"
"야 내가 열두 살 때는 말야, 먹구 싶다고 소원 빈 것만 몇 개였는 줄 알아? 화전에 육전에…. 됐다 됐어. 말을 말자."
앞으로는 별에다 소원 빈 적도 없이 퍽퍽하게 살지 말고 별도 많이 보고 소원도 많이 갖고 살아. 네가 왜 계속 아픈 줄 알아? 낫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그래.
나 낫고 싶어요.
거짓말.
사실은 딱 죽어버리고 싶은 거 아냐? 지긋지긋하고, 힘들잖아. 맨날 열이나 나면서 누워있는 게. 여기 오면 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 아프기만 해서 짜증 나잖아. 아는데 미안하지만, 살아. 나 죽을 애 붙잡고 계속 밥해 먹이고 물 떠다 바친 거 아냐. 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넌 살아야 해 바보야.
미안해. 너무 분위기가 무겁다. 그건 됐고 네 이름 말야. 생각해 봤는데, 내 은인이 박가였거든. 꼭 닮고 싶은 좋은 분이었어. 너 박가 어떠냐? 이름은 앞으로 별처럼 고운 이 되라는 뜻으로 별 성자에다 될 화자 써서 박성화. 예쁘지.
뭐 놀이패 씨름꾼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이름이긴 하다만 넌 눈도 맑고 또랑또랑한 게 이름이 아까울 놈으로 크진 않을 거 같으니까. 성화야, 빨리 나아. 나으면 내가 이름도 써줄게. 좋은 종이에다.
이름이 예쁘고 자시고, 박성화는 별빛에 빛나는 김홍중의 눈동자 안쪽만을 파헤치듯 바라봤다. 어여쁘다. 눈앞에 있는 게. 성화는 딱 거기까지 듣고 할 말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뭐 중의적인 표현 그런 게 아니구, 정말로 뒤로 훅 넘어졌다. 열이 볼에만 오르는 줄 알았더니 머리꼭지까지 오른 거 아냐? 하고 나중에 홍중이 놀리듯 말했지만 사실 성화는 죽도록 지끈대는 머리통을 꾹 참고 홍중 옆에 앉아 있던 거였다. 등줄기로 비 오듯 흐르는 땀도 다 무시하고 고운 내 님이 옹알대는 걸 보려고. 어떤 이들은 죽는 날이 오도록 사랑을 모른다던데, 나란히 앉은 작은 참새 둘은 벌써 연정을 목구멍 깊은 곳에 삼켰다. 성화는 그 밤에 귀로 별을 들었다.
성화는 속에 별을 담은 대신 그날 이후로 목을 쓸 수 없었다. 다음 날 기적처럼 내린 열과 몸에 군데군데 번져있던 붉은 열꽃은 씻은 듯이 자취를 감췄지만 단 하나의 음절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고 걱정스레 수건으로 팔을 닦아주며 쉴새 없이 솟아나는 샘 같은 눈으로 뜨거운 물을 흩뿌리는 홍중과 눈을 맞추고 이름, 불러주세요- 하고 말하려던 입술은 벌어지기만 할 뿐 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말없이 어깨를 톡톡 치며 어루만지는 성화에 홍중은 제 별을 안고 성화 대신 소리 내어 울었다.
잘생긴 놈이 말을 못 해서 어째, 창이나 시키려 했더니만 다 글렀네. 하고 말하는 대장을 몇 날 며칠 따라다녀 결국 줄 타는 것을 배우기로 한 성화는 뭘 해도 맑게 웃었다. 줄에서 미끄덩 넘어져도 그저 웃고, 멋 모르는 아저씨들이 말을 못 한다고 귀도 안 들리는 줄 아는지 성치 못한 말을 한마디씩 툭툭 던져도 그저 웃었다. 복장이 터지는 건 늘 홍중이었고 성화는 저 대신 화내는 한참 아래의 굳센 머리통이 어찌나 고운가를 생각하며 그저 빙그레 웃었다.
성화의 키는 말을 못 하는 보답인 양 쑥쑥 컸다. 목이 굵고 선이 뚜렷한 콧날이며, 눈매에 갈라진 턱이 잘났다. 홍중의 소원은 열심히 벌어 성화에게 몸에 꼭 맞는 비단옷을 한 벌 지어주는 것이었다. 도포에, 비단 속곳에, 갓은 못 써도- 아니 집에서 몰래 입혀서 나만 볼 건데. 그 갓 좀 쓰면 어때. 나중에 꼭 큰 판에 서서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아 울 서방 집에 앉혀두고 나만 보게 해야지. 요즘은 그 꾀죄죄한 거 입고 줄만 타도 여인네들 입이 벌어져서 못쓰겠어. 아- 예전의 조그만 내 박성화가 보고 싶다.
홍중은 성화가 뒤로 넘어간 날 이후로 불면증을 얻었다. 날밤이 새도록 감긴 눈꺼풀 아래의 알사탕이 데굴데굴 잡생각을 담고 굴렀다. 잠이 오지 않으니 매일 밤 옛날의 영화와 침몰의 부질없는 회상, 목숨줄 뒤에 질기게 붙는 위험이 떠올라 차라리 성화를 닳도록 쓰다듬으며 내 님한테 무얼 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밤새 홍중이 매달려 보챈 게 힘들었는지 먼저 달려든 주제에 끙끙대며 앓는 성화의 어린 이마를 살살 쓰다듬는다. 인생 뭐 있소, 원래 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소중한 것 지키며 살지. 남들 모두 성화 저 녀석 홍중이 없으면 어찌 살까 걱정했지만 홍중은 저야말로 성화가 없으면 원래 없던 듯 부서질 것을 알았다.
홍중이 눈으로 가만가만 성화의 눈, 코, 입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열 번을 채우면 하늘의 도우심에 가끔은 단잠에 들 수 있었다. 앞에 남겨진 중한 할 일이 있음에도 오랜만에 별나라의 기분 좋은 꿈에 잠겨 성화 품에 있던 홍중은 눈을 붙이고 얼마 안 가 벌써 밖의 수탉이 홰를 치는 것에 별나게도 불안한 마음을 속에 채웠다.
"아 저놈의 닭, 확 삼복 탕을 끓여 먹을까부다."
옆에서 홍중이 깰까 조용히 세숫물을 내오던 성화가 입 모양으로만 신나게 웃는 게 여전히 예뻐서 괜히 홍중은 이불을 걷어차며 성을 냈다. 이 봄에 괜한 잡생각은 하는 게 아니다.
형. 소리 없이 사랑을 말하는 성화는 몸에 오색 빛 놀이옷을 껴입는 홍중의 얇다막한 허리를 가만히 뒤에서 안았다.
"나 열흘이나 있으면 온다."
왜냐고 묻듯 이 사이에 자그마한 귀고리가 달린 귓바퀴의 연한 부분을 살짝 끼워 앙다무는 게 앙탈 같아 홍중은 푸스스 웃었다. 밥 잘 챙겨 먹고, 기둥에 줄 다시 묶어야겠어. 헐거워졌더라.
"누가 맘에 든다구 이름 물으면, 김 씨라고 그래."
정작 어디 가는지는 입 밖으로 끝내 뱉어내지 않고 고집스레 다물린 조그만 붉은 꽃잎 두 장에 성화는 숨소리를 가만히 죽였다. 요새 나가는 일이 너무 잦아, 밤에도 자꾸 어딜 가잖아. 걱정이 가득 묻은 성화의 깨끗한 눈을 고요히 바라보는 홍중은 성화가 무어라 말하는지 다 안다고 했다.
'가만히 있어 봐.'
성화가 홍중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싸리문을 벌컥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른 봄의 살짝은 쎄한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오자 홍중은 성화가 조금은 늦게 돌아오길 바라며 품속에 꿍쳐 놓았던 짧지도 길지도 않은 편지를 찢어진 벽 종이 뒤에 끼웠다.
돌아오기 전에 나가고 싶었는데. 줄 위에서 부채를 너울거리는 살짝 그을린 손에 뭘 소중히 감싸들고 걸어오는 걸 보니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덕에 홍중은 저 언덕서부터 손을 흔들거리는 성화가 앞에 와서 수줍게 웃을 때까지도 신발도 다 못 신은 채로 발을 땅에 풀로 붙인 듯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인지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떨리는 손으로 봇짐을 고쳐잡는 홍중의 손을 끌어다 그 위에 놓아준 것을 보니 작은 제비꽃 뒤꽂이였다.
"이게 뭐야?"
다른 쪽 손을 끌어다 그 위에 손가락으로 써가는 글씨를 보아하니 제 것이 분명했다. 홍중은 제 이름을 꼭꼭 눌러 손에다 적는 성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담았다. 꼭 가지고 다니라며 커다랗게 입을 벌려 같은 말을 되뇌이며 찌푸려진 성화의 미간을 손으로 꼭꼭 눌려 펴주는 홍중의 눈앞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성화는 홍중이 없어도 마을 놀이판에서 변함없이 줄을 탔다. 마당놀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 대장의 소맷부리를 붙잡고 몇 번이나 홍중이 도대체 어디로 놀이판을 뛰러 갔기에 열흘씩이나 무리를 떠나 있는거냐 콕콕 찔렀지만 대장은 평소답지 않은 자신 없는 눈빛으로 매번 다른 지역의 이름을 댔다. 이제는 아예 종이에 말을 적어 매일 앞에다 흔드는 성화에게 대장은 하는 수 없이 홍중이 어디로 갔는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안 해도 될 말을 무겁게 했다.
"똑 부러진 놈이 뭐 어련히 잘 돌아오지 않겠냐?"
전에 없던 자신 없는 눈빛의 성화는 그날부터 줄에서 자주 부채를 놓쳤다. 홍중의 불면증이 성화에게로 옮겨간 탓이었다. 한 것도 없이 자꾸만 감기는 눈을 홍중이 없는 새 난 병이라고 믿은 성화는 세 번 놀던 판을 한 번으로 줄이고 남은 시간을 헛헛한 마음으로 홍중과 자신의 방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때웠다. 혼자 먹는 밥은 껄끄럽고 맛이 쓰다. 벽지와 마주 보고 목각인형같이 밥을 입에 떠 넣던 성화가 벽지의 유독 튀어나온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날은 어째 그 시(時)가 좋지 않았다.
'고 머리통 속에 이상한 상상 담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성화가 제 입술과 홍중의 편지를 같이 짓씹으며 반도 먹지 않은 밥과 반찬이 올려진 소반을 들고 마루에 한쪽 발을 딛는 순간 시끄러운 쇳소리와 함께 웬 관병들이 온 주막을 즈려밟으며 들이닥쳤다. 죄인 김홍중은 오라를 받으라! 없어진 님을 찾는 이가 여기 또 있네. 성화는 희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들고 있던 소반을 놓쳤다.
맨발에 눈에 한 바가지 물을 찰랑이며 성화는 홍중이 걸어간 길을 하염없이 따라 걸어갔다. 길 위에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을까 발로 땅의 흙을 평평하게 쓸어넘기던 성화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대장이 양옆의 관병들에게 끌려가며 성화에게 눈짓했다. 꼭 홍중이 돌아올 것이라는 듯이.
이미 돌아서서 가는 이에게 사랑을 부르지 말지어다.
성화는 영문 모를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졌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남은 이들은 세간을 챙겨서 되도록 멀리 떠날 것을 종용했지만 성화는 홍중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곳에서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기다림은 헛된 희망으로 이어져 그믐달이 보름달이 되도록 망부석마냥 가만히 앉아 홍중과 제 향이 섞인 이불 밖을 나서기가 두려웠던 성화에게 찾아온 것은 다리를 절고 10년은 더 늙어 뵈는 대장이었다. 간밤에 꾼 꿈결에 오랜만에 홍중을 봤는데, 달빛에 비친 유리창보다 더 반짝이는 눈을 하고 제게 팔을 벌렸다. 형이 올 거야. 오늘은 올 거야. 성화는 직감했고, 손바닥이 찢어져라 주먹을 쥐었다. 저는 다리와 질질 바닥에 흔적을 길게 남기는 수레를 끄는 대장은 지독히 지친 채로 성화를 불렀다.
"성화야,"
저와 홍중의 마지막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예쁘게 웃는 홍중의 머리 뒤에 제가 준 제비꽃이 달랑달랑 달려 있고 그 손에는 제 손이 덮여 있을 그림을. 선 곳이 굳이 꽃밭이 아니라 놀이판의 흙바닥이어도 성화는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대장이 늙어 아프면 어른들 제치고 요 놀이판 우리한테 물려달라고 조르자, 하던 홍중이 머릿속에 고운 모래 마냥 부드럽게 날린다.
수레 뒤의 거적을 거두는 성화의 손이 취한 듯 진동한다. 피가 말라붙은 색동옷 아래 바싹 마른 손바닥 안에 부서지고 반쪽만 남은 보랏빛 자개가 반짝거린다. 형. 너무 멀잖아, 너무 멀어…
성화는 품 안에 잠든 메마른 제 별을 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홍중이 듣고 일어나 성화를 마주 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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